'정약전'에 해당되는 글 2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10점
이덕일 지음/김영사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던 해에 태어난 다산 정약용...
그의 인생을 남인과 노론과의 당파 싸움이 절정에 이르던 때에 시작하여 노론 벽파의 일당 독주 체제의 희생양이 될 때까지의 일화를 그려낸 역사서이다.

1권은 정약용 선생의 탄생과 천주교의 출현 및 정조의 집권하에 안정적인 균형을 이뤄가던 시기에 정약용 선생의 활약이 주로 다루어진다.
이때 등장인물들로는 그 당시 남인의 영수(지금의 정당의 총재)였던 채제공,
희대의 천재였던 이가환 선생님,
한국 천주교의 첫 영세를 받았던 이승훈 등이 있다.

그가 정조와 개혁을 위해 활약했던 내용들이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 10점
이덕일 지음/김영사
정약용 선생의 형들이였던 정약종, 정약전에 대한 역사도 한 켠에 배치가 되어 있다.

2권에서는 그의 유배 시절 유일한 독자였고, 스승이였던 중형인 정약전과의 편지 내용이 많이 보여지며, 그 시절 정약용 선생님의 사고를 엿 볼 수 있었다.
유배 시절을 인생 한탄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다산학의 체계를 이룰만큼의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 노론의 탄압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전념하였다.
그의 말대로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를 통해 다산학이 완료되었음을 선언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점을 보기 위해 이용하는 "주역"에 대해서도 그는 10년간의 연구와 저술을 통해 주역은 단순한 점 치기 위한 학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가 둘째 형이 정약전에게 보낸 서찰에 그런 의미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의 복서는 옛날의 복서가 아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문왕이나 주공이 지금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결코 점으로써 의심나는 일을 해결하려 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러한 사리(事理)는 후세의 군자들도 반드시 알 것입니다.

즉, 정약용 선생은 "주역"이 복서가의 효용이 아니라, '나라의 의문점을 결단케 하여
백성들의 쓰임에 앞서게' 한 것이다. 정약용 선생에게 "주역"은 성인의 대도(大道)이지
복서가의 점서(占書)가 아니었다.

정약용 선생이 저술에 전념할 동안 정약전 선생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민중과의 삶을 교류하며 실학을 실천하고 있었다
정약전 선생도 다산 선생만큼의 왕성한 저술 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그 유명한 자산어보를 저술하게 되었다.
자산어보를 통해 조선의 해양학을 정리하며 민중에 섞이고자 하였다.
자산어보 내용 중에 고래와 관련된 내용도 있는데,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어찌 그 당시에 그런 세세한 내용들을 작성할 수 있을까? 라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과연 그의 통찰력은 어느 정도인가라는 궁금증이 절로 들게 할 정도이다.

정조가 말하길 "형이 아우보다 낫다"라고 했다.
즉, 아우인 정약용 선생이 높은 관직에서 활동하긴 했으나, 그의 형, 정약전의 학문적 지식이 다산선생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다산선생이 저술에 전념할 시기에 그의 형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역사서이긴 하지만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듯 술술 넘어간다.
내가 과연 역사서를 읽고 있는 것이 맞는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작년에 방영한 인기 사극 드라마였던 "이산"을 보는 듯 했다.

내가 정약용 선생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집 근처에 있는 다산유적지를 다녀온 이후 이 분의 사상과 일대기가 궁금했을 뿐이였고, 다음 날 출근하자 말자 주문한 책들이다.

읽고 나서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노심초사하늗ㄹ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의(誠意) 두 글자를 죽을 때까지 간직해야 한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意)을 성실(誠)하게 하였다'는 성의라는 두 글자를 수도 없이 헤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2. 마음에 조금의 틀도 없이 오래 화합하면 자연히 믿음이 생겨 안방에서는 화평의 기운이
   한덩이로 빚어지고 자연스레 천지의 화응을 얻어 닭이나 개, 채소나 과일 따위도 또한
   각기 번성하여 물건을 억눌러 막음이 없고 일에 억눌러 맺힌 게 없으면 나 또한 임금의
   은혜라도 입어 자연히 풀려 돌아가게 될 것이다.
3.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이며... ... ... 그네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모르면서 그냥 책만 읽는 것이니 이를 두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4. 반드시 가장 총명한 선비가 지극히 곤궁한 지경을 만나서 종일토록 사람 소리나
   수레바퀴 소리가 없는 곳에서 외롭게 지낸 뒤에야 경전과 예서(禮書)의 정미한 뜻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천하에 이런 공교로움이 있겠느냐.
5. 또 빈곤하여 가난의 어려움을 겪으면 마음과 뜻이 단련되어 지혜와 생각을 넓힐 수 있게
   되어 인정(人情)이나 사물의 진실과 거짓의 모습을 두루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6. 무릇 남자가 독서하고 행실을 닦으며 집안일을 다스릴 때에는 한결같이 거기에 전념
   해야 하는데,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정신력이 있어야만 근면하고
   민첩함이 생기고, 지혜도 생겨서 업적을 세울 수가 있다. 참으로 마음을 견고하게 잘
   세워 똑바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비록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
7. 참으로 술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처럼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과 혀를 적시기도
   전에 직접 목구멍으로 넣는데 그래서야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얼굴이 붉은 귀신처럼 되고 토악질을 하고 잠에 골아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8. 사람이 지기(知己)가 없다면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것이다.
9. 천하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옳고 그름(是非)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利害)의 기준이다. 이 두가지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해를 입는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경우
   이고, 가장 낮은 등급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경우이다.


** 관련 글 **
2009/11/22 - [쩐의여행/가자, 발길 닿는대로] - 다산 유적지, 실학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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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의시대

나답게 살아가고 나답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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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날씨도 다소 풀리고 해서 집에서 늦게 다산 유적지로 출발하였다.
집에서 20여분 거리에 위치해 있고,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인데, 문제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직 어려운 숙제가 아닌가 싶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약용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를테고, 실학이 무언지도 모를테구, 천문이 어떤 것인지, 지리가 어떤 것인지...
그냥 이런 것도 있구나 라는 정도만 인지하고 있어도 나중에 좀 쉬워지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무작정 나서게 되었다.

이곳 다산유적지는 화려함은 없다.
단지 소박하고 다소곳한 분위기를 풍기며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어쩜 우리네 인생에서 우리들은 너무 화려한 것들만 쫓고 바라는 것은 아닐까?
소박하고 단아한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을 간과하고 너무 화려한 허울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런지...

주차장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곳이 다산문화원이다.
요 길 끝자락 오른편에 실학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다산 문화원 내부의 모습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초상과 관련된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우리 아들 녀석은 한글은 읽지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한자를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다산 문화원을 나와 다산 정약용 생가로 가는 길이다.
초겨울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을씨년스러웠지만, 가을이 한창일 때가 상상이 가는 곳이다.

다산 생가는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리운다.
정약용 선생님의 호는 우리는 흔히 다산(茶山)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외에도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자하도인(紫霞道人)도 있다.
그 호 중에 하나인 여유당을 따서 생가 명칭도 그대로 여유당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이 되었다가 1986년 복원이 되었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큰 홍수였음 이 곳까지 그 화가 미쳤을까라는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이 곳은 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곳이기도 하다.


관련된 글을 읽다가 참으로 공감가는 글이 있어 잠시 빌린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 한다. (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 여! 겨울을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깍는 듯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득해 낸 지가 6, 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엇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두어 버렸었다. 초천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언 불혹의 나이에 다가서고 있지만, 나의 단점을 냉철하게 판단하기가 싫다.
아직도 미개한 생물에 불과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글귀였다.

이 곳은 정약용 선생님이 묻혀 있는 곳이다.
생가 바로 뒤 언덕에 모셔져 있다.

묘소 주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팔당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나 자신은 비록 삶에 실패한 인간이지만, 내 자식들은 정약용 선생님 같은 품위를 가진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곳은 실학박물관 내부이다.
제 3전시실에 잇는 별자리 체험관이다.
천장에는 온통 별자리로 가득했다.
어린 시절 유난히도 별자리가 많은 겨울 하늘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정작 그 많은 별자리를 알고 있지 못했다.
옛 어른들께서는 저 많은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며 미래를 예측하곤 하셨는데,
한낮 미개한 생물인 나는 아직도 의미를 모르고 있으니...

이 곳은 애니메이션관으로 저 분은 정약전 선생님이시다.
유배 당시 자산어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기시는 일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아이들도 무난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건 실학 박물관 밖에 설치되어 있는 거중기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이 거중기로 수원성 축성에 이용이 되어 노역을 하는 많은 백성들이 편했다고 한다.

이번 발길은 아이들에게 유익했다기 보다는 내 자신을 둘러볼 수 있는 발걸음이 되었고, 좋은 경험이 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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